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문단 편집) ==== 12월 14일, 아프간전 승리 공식 선언 ==== 그래도 '''12월 14일에 미국은 승리 선언'''을 하기에 이르고 이 시점에 이르러 사실상 탈레반 정권은 끝이 났다. 탈레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고, 일부 잔존세력이 남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서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아프간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소집된 본 회의에서 12월 22일 새 임시정부의 수립이 결의되고, 탈레반 본거지 칸다하르를 함락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적이 있는 하미드 카르자이가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지명되었다. 주요 도시 및 교통망은 미군이 완전히 장악했다. 10월 7일에 시작된 전쟁은 불과 2개월 7일만에 끝났다. 보기에 따라 2(현지시간)~3(미국시간)일 후에 북부동맹군이 알 카에다 최후 거점인 토라보라를 완전 장악한 것을 전쟁 종료로 보기도 한다.(이에 따라 미국 위키피디아는 12월 17일로 본다.) 사실 2001~02년 즈음부터 미국은 이라크전을 할 생각에 아프간전에서의 마무리와 탈레반 소탕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된다. 덕분에 탈레반의 주력들은 미군과 북부동맹군을 기만하며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서 다수가 도주하여 전력을 보존한다. 포위되어 있던 빈 라덴조차도 미군의 지상군 포위망이 없어서 도주가 가능했다. 중부군 사령부에서는 10산악사단의 증원배치를 요구했었으나 럼즈펠드는 이를 거부했다. 게다가 IAI(아프간 재건 임시정부)와 탈레반을 몰아내는데 역할을 한 군벌인 북부동맹이 지원금 배분 문제를 두고 다투는 바람에 아프간 정규군과 경찰의 교육과 배치가 늦어졌다. 이렇듯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스스로 1년이 넘도록 개판 5분 전인 아프간의 상황을 방치했고, 되지도 않는 이라크전을 준비하느라 중부군 사령부만 들들 볶아대고 있었다. 게다가 항공폭격의 초기성과가 너무 좋았던 나머지 최소한의 투입으로 정밀타격을 통해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요하던 럼즈펠드 체제 속에서 미군의 항공폭격과 정밀타격의 한계는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당장 탈레반 주력들을 포위하고도 제대로 된 항공폭격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바람에 적이 도주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라크전을 준비하느라 문민통제를 미국 역사상 최악으로 남용할 정도로 정신나가 있던 게 럼즈펠드 체제의 부시 행정부였다. 한편 일방적 침략이었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달리 이 전쟁은 '''해방'''의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미군을 환영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대다수의 농촌 아프간인들은 탈레반의 몰락이나 미국의 진주에 별로 소감이 없었다고 한다. 어차피 아프간인들은 국가보다는 부족에 더욱 큰 소속감을 느꼈기 때문에 중앙정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도시에서와 달리 향촌지역에서는 탈레반 이전부터 [[이슬람 원리주의]]가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에 [[탈레반]]의 막가파 정책도 조금 더 불편해졌을 뿐, 아프간인들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탈레반을 호의적으로 본 것은 아니었고, 이것이 탈레반이 몰락한 원인이기도 했다. 결국 농촌 아프간인들의 입장에서 미국의 진주와 카르자이 정부 수립은 그저 자신들과 별 상관 없는 중앙정부가 바뀐 것에 불과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자들의 수기를 담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 <아연 소년들>에서도 소련군들이 진주해올 때 웃으며 손을 흔들던 아프간인들이 소련군들이 퇴각할 때도 똑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반면 농촌지역과는 달리 도시민들인 카불 시민들은 탈레반의 축출을 기뻐했다. 도시 지역은 왕정과 공산정부 시절에 상당한 수준으로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탈레반의 정책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편을 야기했던 것이다. 탈레반이 쫓겨나자 즉각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북부동맹군을 환영하였고 남자들은 탈레반의 강요로 길렀던 수염을 밀어버렸으며 여자들은 부르카를 벗어던지고 오랜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금지되었던 각종 음악과 춤이 등장했고, 탈레반에 당해왔던 시민들이 탈레반 병사들의 주검을 길거리로 끌고 와서 모욕을 가하는 것이 우리나라 뉴스에 여과없이 방송되기도 했다. 참고로 탈레반 정권의 붕괴는 의외의 나비효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당시 탈레반의 비호를 받으면서 아프간에 숨어 있던 수천명의 사우디 무자헤딘들이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다시 모국인 사우디아라비아로 돌아왔고, 이들은 사우드 왕가도 타도대상으로 보던 과거의 태도에서 한발 물러서서 사우드 왕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대신 사우드 왕가에게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탈레반과 같은 샤리아 율법통치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사우드 왕가가 이런 미친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으므로 이들은 대규모 테러리즘을 벌여 수백명을 살육하고 사우디 내무군 및 보안군과의 내전에 가까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란 역시 피해자 반열에 들었는데, 이란은 자신들이 미국의 아프간 전쟁을 도와주면 미국이 아프간에서 이란의 이익을 인정하고 지역적인 협력관계를 맺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미국은 나몰라라했으며, 이란의 대표적 라이벌인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을 끌어들여서 과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아프간에서의 이란 영향력을 파키스탄과 힘을 합쳐 몰아내려 했고 뿔난 이란은 다시 반미로 전환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